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누에바에스파냐-명나라 관계 (문단 편집) === 후반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포토시]]와 사카테카스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은의 양은 유럽의 총 은 보유량을 7배 늘려놓을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는데, 근데 그것보다 더 많은 양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중국으로 갔다. 청나라가 영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기 이전 중국의 주 교역 상대는 바로 스페인이었다. 영국 역시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스페인 달러로 결제대금을 지불하곤 했다. 명나라 말 [[장거정]]의 조세개혁 [[일조편법]]은 당시 명나라에 은화가 늘어난 것을 반영해서 새로 개혁된 조세제도이기도 했다. > 시암에 이어 두 번째로 대규모 화교 공동체가 조성된 곳은 필리핀 마닐라였다. 에스파냐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화교 공동체 또한 거의 전적으로 남성으로만 구성돼 있었다. 원주민 여성과의 내연 관계 혹은 혼인에 의한 메스티소(혼혈 인종)의 출현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이 언어와 문화적 기술이 부족하고 상호 문화 교류에도 서툰 유럽 이주민들을 대신에 문화의 조정자 겸 경제적 중개인이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복합 사회 루손섬에서는 현지인을 가리키는 에스파냐식 표현인 에스파냐화된 인디오의 문화는 최하위로 분류되고, 중국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가 둘 모두 고급문화의 뿌리를 둔다는 인식하에 최고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원주민들에게 융자도 해 주며 채무 불이행 시에는 토지를 압류하는 등 도시에 기반을 둔 경제를 농촌의 지주에게까지 반경을 넓혀 나간 것은 중국계 필리핀 메스티소들이었다. >---- >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870~1945 - 3부 이주와 소속감 비교하자면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실질적인 식민지 운영 인력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현지 필리핀인/인도인/스리랑카인 무역상인들 혹은 기존의 남인도 [[케랄라]]에 거주하던 도마 기독교인[*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시로말랑카라 가톨릭]] 문서 참조]이었던 것과 1:1로 대입은 할 수 없지만 화교들은 식민지 중반까지도 별 힘을 쓰지 못하다가 후반에 스페인의 독점무역이 해제되고 금융지배력이 약해지면서 [[필리핀 도독령]]이 유럽,영국,북미와 무역로를 열고나서야 그 틈을 타 비로소 주도권을 쥐며 힘을 키우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